꽤 많은 상황에서 양가감정을 느끼곤 한다.
짜증 나면서도 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미워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 들고,
지겨우면서도 궁금한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다.
이외에도 수 많은 양가감정들이 있다.
그 감정들 사이를 오고 가느라 힘든 시절이 있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순간에 떠오르는 깨우침은, 그 양쪽의 감정들을 모두 인정해주고,
풀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나를 즐겁게 하는가? 또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가?
이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은 무엇인가? 하나의 감정으로 설명이 되는가?
대표적인 양극단의 감정들이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수많은 감정의 꼬리표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원의 욕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서 인정해주고, 풀어주어야 한다.
가장 먼저는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것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중의 하나이다.
특정한 무리에서 버려지면 생존에 위협을 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나 회사에서 왕따를 당하면, 죽을만큼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해버린다.
이것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무리에서 버려지고, 따돌림을 당한다고 죽는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아직도 지역사회나 좁은 무리의 바닥에서 살아가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예전과 같이 절대적인 모임들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의존도에 의한 무리들이 대다수이다.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것을 부정하려고 들 수록, 그것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들이
솟아오르게 되니 말이다. 차라리 근원의 두려움을 인정하고, 풀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두려움의 반대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절대적인 사랑이란, 신의 선물이다. 인간이 스스로 창조해내기 힘든 감정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본체는 신이다.
우리의 자아들을 내버리고, 근원의 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면, 우리는 사랑 안에 살게 된다.
그리고, 신은 우릴 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 근원에는 두려움이 없다. 두려움으로 가는 길의 촉발점은 의심이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뱀의 간교에 속아서 의심으로 선악과를 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랑의 반대편으로 향한 것이다.
그 근원의 사랑, 절대적인 사랑은 우리가 방향을 돌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다.
언제든 자신의 방향을 돌리면, 신의 절대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한순간에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고, 그런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것을 회개라고 한다. 착하게 살고, 그런 종류의 삶의 지침이 아니다.
단지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재의 방향을 파악하고, 그 극단의 감정의 근원을 해소하는 것이다.
이 양가의 감정들은 지속적으로 피어오를 것이다.
이 삶에서 완전히 한쪽의 뿌리를 뽑아낸다면, 성인의 경지에 오를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지속적으로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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